김홍도 행려풍속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 외에 위의 풍속도보다 한층 더 완성된 형태의 인물소묘 작품 으로 '풍속화첩'을 들 수 있다. 한폭의 크기는 22.7 x 27cm이고 전체 25점으로 꾸며진 이 화첩은 정확한 년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인물들의 묘사기법과 필치로 보아 40대 초반의 작품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이 화첩은 배경을 생략한 소묘풍에 약간의 담채를 가해 종이에 그린 것으로, 완성된 작품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일종 의 풍속화 스케치북 형태이다. 이밖에 우리가 흔히 대할 수 있는 서당 모습, 대장간 모습, 활쏘기(射弓)대회, 논갈이풍경, 장터풍경, 주막집 풍경, 길쌈매기, 나룻배풍경 그리고 우리가 혹간 익살 스럽게 감상하는 (양반이 부채로 얼굴을 감추고 몰래 훔쳐보는) '빨래터의 아낙네들' 등 풍속화에서 당시의 소박했던 생활상을 유추해 볼수 있음에 큰 의미가 있다 하겠다. 김홍도 풍속화첩 - 무동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 풍속화첩 벼타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홍도 풍속화첩, 서당,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홍도 풍속화첩 우물가,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 풍속화첩 점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다음 蕙園(혜원)을 만나보자. 혜원 (蕙園) 신윤복(1758- 1814.)은 영조 34년, 화원 신한평과 홍천 피씨(皮氏)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릴 때의 이름은 가권(可權) 이었는데, 성장 후에 윤복(潤福)으로 개명했다. 그의 아명(兒名)이 가권(可權)으로 밝혀진 것은 최근의 일로, 그가 그린 유명한 미인도(간송미술관 소장)에 신가권(申可權)이라는 낙관을 남김에 기인한 것이다. 신윤복의 본관은 경상남도 고령으로 字는 입부 (笠父), 덕여(德如)이며 호는 혜원(蕙園)이다. 그는 조선후기의 관리이자 화가로서 특히 산수화와 풍속도가 일품이다. 그는 담백 (淡白)한 김홍도의 작품과 달리 배경화면과 인물화에 화려한 색채 를 많이 사용해 그의 그림은 조선회화의 대표적인 채색화라고 불리 울 만큼 수려한 색상화의 특징을 구사했다. 화공가문 출신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의 증조부 신일흥과 종증조부 신세담은 당시 그림을 담당하는 정부관서 도화서(圖畵署)의 화원이었으며, 부친 신한평은 영조의 어진(御眞)을 두차례나 그릴만큼 실력을 인정받았다. 혜원 신윤복 미인도 그러나 정조 초기에 이르러 신한평이 그린 그림중 한 작품이 어진 으로 볼 수 없을만큼 미흡하다 하여 반대파 관료들의 탄핵을 받아 유배되기도 했으나, 관직은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고, 산수, 인물, 초상, 화조를 잘 그렸다. 아울러 조선 전기시대의 문신겸 학자였던 신숙주와 신말주의 방계후손이고, 일제 강점기의 역사 학자 신채호의 8대 방조가 된다. 부친 신한평의 영향을 받은 신윤복도 도화서의 화원이 되는데, 관직은 그 역시 첨정과 서반무관(西班武官)인 철절제사에 이르렀다. 특히 인물화와 풍경화 외에도 많은 풍속화를 남겼는데, 그의 대표작으로는 미인도와 단오도 등을 들수 있다. 18세기말에 이르러 양반들의 위선적인 태도와 이중성을 풍자하고, 부녀자들의 자유분망함과 연애사상의 애환 등 서민들의 생활상을 그림으로 대변하기도 했다. 신윤복 단오풍정 풍속도첩에서 예컨데 양반과 기생 혹은 여염집 부녀자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성적인 회화를 적나나하게 그리며 양반들의 행태를 신랄하게 풍자하는 한편, 춘화도(春花圖)를 그려 반 유교적인 점잖치 못한 그림을 그린다 해서 관직에서 쫓겨났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바꿔 말해 김홍도가 당시 조선화풍의 정통 주류였다면 신윤복은 비주류로 분류돼 조선화단의 이단자로 취급되었다. 이후 동시대인들에게 철저하게 외면을 당해 조선 화인열전(畵人列傳) 에서도 그의 이름을 찿아 볼 수가 없었으며, 그에 대한 기록 조차 보기 힘들어 1800년 정조 사후 자유분방했던 사회분위기 가 점차 사라지면서 그의 작품활동도 쇄퇴기에 접어든다. 그는 유달리 화려한 색채를 많이 사용한 그림을 즐겨 그렸고, 시골 저자거리의 서민적인 풍속 또한 예리한 화필로 잘 묘사했다. 주요작품으로는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와 '미인도', '월하의 연인' 등이 있으며, 주로 세련된 여성미와 남녀간의 사랑을 주제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 혜원 신윤복 월하정인 신윤복 청금상련 이와 같은 신윤복의 풍속화등은 소재선정부터 구성,인물들의 표현방법등에 이르기까지 김홍도와는 큰 차이를 보여, '풍속 화첩'에는 단오도, 연당(蓮塘)의 여인, 무무도 (巫舞圖), 산궁 수진(山窮水盡), 선유도(船遊圖) 등이 전해진다. 신윤복은 남녀간의 정취와 낭만적인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나타 내기 위해, 섬세하고 유려한 필선과 아름다운 색채를 즐겨 사용 하여 그의 풍속화들은 매우 색다른 감각과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또한 인물화에 있어서는 권세가들의 주취(酒醉)모습과 표정 묘사에 머리카락 하나까지 세밀하게 표현하는 등, 이러한 여러가지 정황의 그림들 역시 양반사회에 대한 풍자로 이어 진다고 평가한다. 아울러 이때 사용한 다채로운 물감은 주로 중국과 서양 상인을 통해 수입된 다양한 안료로, 이를 효과적 으로 유용하게 사용한 첫 화가로 기록된다. 혜원 신윤복 쌍검대무 신윤복 주유청강 특히 촌락, 저자거리의 풍속도 중에서도 무속(巫俗), 기녀(妓女), 주점(酒店)의 색정적인 면을 많이 그린 풍속화가로서 현실표현에 치중하고 있다. 이 또한 유교(儒敎)중심사회에 대한 반항이였었고 인본주의 의 표방이라는 평가도 있다. 신윤복의 풍속화들은 배경을 통해서 당시의 생활상과 복식(服式)등을 사실적으로 보여 주는등, 조선 후기의 서민생활과 멋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아울러 그에 대부분의 작품들에는 짧은 찬문과 함께 도인(圖印) 이 찍혀 있지만, 한결같이 연대와 시기를 밝히질 않아 화풍의 변천과정을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가 남긴 작품은 1813년의 작품까지 전해 지는데, 대략 그때 이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뿐, 정확한 사망시기와 정황은 전해지질 않고, 다만 그가 이 시기까지 그림을 그렸을 것이라는 정도만 알려져 있어 아쉬움이 많다. 혜원 신윤복 기방무사 혜원 신윤복 노상탁발 혜원 신윤복 무녀신무 다음은 오원(吾園)이다. 오원 (吾園) 장승업(張承業.1843-1897)은 조선 말기의 화가 로, 본관은 대원(大元)이며 字는 경유(景猶)이고 호는 오원 (吾園)이다. 우선 그의 일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지금 으로 부터 약170여년전, 한양의 한 세도가 대청마루에서 몇몇 벼슬아치들이 시화와 주연을 즐기다가 귀가할 무렵 주인은 잠시 배웅하러 자리를 떴다. 이때 어지러진 지필묵 (紙筆墨)을 치우러 들어온 어린 머슴이 물끄러미 살피다가 문득 붓을 들어 그림을 그렸다. 주인이 들어오고 어린 머슴 은 순간 당황하여 얼른 그림을 감추자, 주인은 호기심에 그림을 보고 그의 출중한 그림 솜씨에 깜짝 놀란다. 이 소년 이 바로 열살배기 장승업이었다. 그의 호에 대한 유래도 있는데, 추사 김정희가 그의 소질을 인정해 지어주었다는 설과,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처럼 '나도 당대 절세화가 들의 호, 원(園)의 반열에 오르리라.' 라는 야심찬 의욕에서 나 吾(오)자를 붙였다는 설도 있다. 일찌기 부모를 여위고 고아로 떠돌며 거리의 가난한 화가들의 어께너머로 그림을 배우다가 세도가의 집에 머물러 출신성분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성장한 후 평소 술을 좋아해 주모 (酒母)나 여인들이 술 시중을 들면 그 답례로 즉석에서 치마폭에 그림을 그려 주거나, 혹은 그림을 술과 바꾸는 일이 허다했다고 전해진다.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마흔쯤에 이르러 비로서 화명을 떨쳤고, 마침내 당시 명문거족인 민씨 집안에 알려져 민영환의 후원으로 고종에게 천거돼 도화서 화원이 되어 벼슬은 감찰직 까지 이르렀다. 이때 청나라의 위안스카이나 리홍장 등은 그의 그림을 받으려고 수시로 청탁할 정도로 출중해, 절지(折枝), 기완(器玩), 산수, 인물, 영모, 사군자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는데 뛰어났다.
필치가 호방하고 대담하면서도 소탈한 여운이 감돌아 조선 후기 말엽을 대표하는 화가로서 안견 (安堅), 김홍도와 더불어 조선 화단의 3대 거장으로 일컬어 진다. 화적(畵跡)으로는 국립덕수궁 미술관 소장의 '기명절지도',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풍림 산수도('楓林山水圖'), 산수영모절지 병풍 ('山水翎毛折枝屛風') 및 개인소장의 팔준도('八駿圖'),매화도('梅畵圖'), '교변람폭도', '수기화상포대도', '호산어은도' 그리고, '수상서금도','화조수도' '노안도' 외 다수 전해지고 있다. 아울러 닭을 위주로 그린 계도 (鷄圖)와 세사람 선비를 다룬 인간연도 ('人問年圖'), 쌍마인물도 ('雙馬人物圖'), 송하노승도(松下老僧圖) 등에서 그의 쾌활한 성품이 나타나 당시 생활풍습을 잘 나타내주는 역할에 그림의 가치 가 높이 평가된다. 그러나 평소 술을 너무 좋아하고 자유분망함이 몸에 배인 그는, 틀에 박힌듯한 궁궐생활이 지겹고 견딜 수가 없었던지 왕명을 거스르면서 수차례 궁궐을 몰래 빠져나와 사단 을 일으켜 군졸(軍卒)에게 끌려오길 밥먹듯 했다 한다. 장승업 수닭 보다 못한 민영환대감이 그를 불러 엄중히 문책하면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 라고 하문하자 '술을 마음껏 마시며 자유롭게 살고 싶다.' 라고 답할 정도로, 끝내 화원(畵員)으로서의 최고 명예인 고종의 어진(御眞)완성을 코앞에 둔채 54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후대에 그의 출중한 그림 실력을 아는 이들은 그 가 평생 술에 취해 취화선(醉畵仙)으로 살다가 술에 취해 죽은 후에 술을 찿아 주선(酒仙)이 되었으리라 믿으며 명복을 비는 제사를 수시로 올렸다고 기록된다. 몇해전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 를 조명한 영화'취화선 장승업'이 기억난다. 이 영화에서 장승업 역을 맡은 배우 최민식의 열연이 돋보여, "나는 세상이 나에게 아무리 무어라 해도 오직 내 갈길을 갈 뿐이다." 라는 마지막 대사가 오랫도록 여운을 남긴다. 그렇다면 저들과 근본이 다른 사대부출신의 대가(大家), 사제(四齋)로 일컬어지는 겸재 (謙齋) 정선, 긍제(兢齋) 김득신, 공제(公齋) 윤두서, 그리고 관아제 (觀我齋) 조영석의 삶은 어떠한가 ?. 다음 호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글 : 죽림재 (竹林齋) 김무일 *. 저서. 수필모음집 '레만호에 노을이 진다', 詩畵집 '황혼에 핀 오색무지개'. '오색무지개 은빛속으로', '은빛속으로 가을이 온다' 등, 공저 다수. *. 국립중앙박물관, 예술의전당 후원회원. 현대, 기아차그룹 임원 역임. *. E-mail ; mmm-555@hanmail.net. |